풍설도하 13

풍설도하 13화 – 누각 위의 고백 | 정통 무협 웹소설 연재

풍설도하 13화 — 「누각 위의 고백」


계단은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눈이 얇게 얼어붙은 위에 먼지가 덮여 있었다. 밟는 순간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힘을 주고 비틀면 밑창이 그대로 미끄러져 나가는 자리였다. 서이강은 발을 한 칸 올렸다가, 일부러 뒤꿈치를 반쯤 비틀어 보았다. 의도대로, 밑창이 살짝 흘렀다.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위험한 자리이기도 했지만, 상대에게도 똑같이 위험한 자리라면 싸움은 그만큼 공평해진다.

아래에서 일명회 두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두건을 쓴 자가 앞, 마른 체구의 자가 반 계단 뒤. 둘 다 허리춤에 손을 얹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긴장만으로도 숙련된 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조금씩만 올라오시오.” 서이강이 말했다. “이 계단은 서두르는 쪽이 먼저 미끄러지니까.”


****

두건을 쓴 남자가 먼저 발을 올렸다.

한 계단, 두 계단. 발을 옮길 때마다 눈빛이 계단 모서리와 난간, 서이강의 발끝을 번갈아 훑었다. 이 자리에서 싸워본 적은 없어도, 어디가 위험한지는 아는 눈이었다.

“표사 출신이라 들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길을 지키는 자들이지, 막는 자들이 아니지 않나.”

“길을 막을 때도 있소.” 서이강이 대답했다. “짐이 잘못된 데로 가고 있을 땐.”

마른 자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잘못된 데라는 뜻인가.”

“위에 먼저 올라가는 데는, 그렇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이강의 몸이 움직였다.


****

짧은 도가 허리춤에서 반쯤 빠져나왔다.

칼날을 다 뽑지 않았다. 칼집과 칼날이 같이 움직였다. 서이강은 계단을 한 칸 뛰어오르며, 도끝 대신 칼집 모서리로 두건 쓴 남자의 정강이를 내리찍었다.

쿵—

살과 뼈를 거쳐 계단까지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남자의 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뒤로 쏠리며 균형이 깨졌다. 그 순간, 뒤에 있던 마른 자가 팔을 뻗어 동료의 옷깃을 붙잡았다.

둘이 동시에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 좋은 호흡이었다.

서이강은 그 호흡을 보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계단 중턱, 난간과 벽 사이. 한 사람만 정면으로 설 수 있는 곳.

“말했잖소.” 그가 말했다. “계단은 미끄럽다고.”


****

상서루 안에서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쌓이고 있었다.

“사만 석.”

묵연주의 입술 사이에서 숫자가 흘러나왔다. “이십 년 전 겨울, 사라진 군량 사만 석. 보고서에는 눈보라로 인한 자연 손실이라고 적혀 있었죠.”

왕지훈은 그 말을 듣고도 당장 대꾸하지 않았다.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성 안의 지붕과 성벽, 멀리 관도가 내려다보였다. 그 모든 풍경이 그의 어깨 위에서 한 번 지나간 적이 있었다.

“자연은 아무 잘못이 없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 그 눈은, 내게는 차라리 핑계였다.”

“핑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짓말.” 왕지훈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사실보다, 거짓말이 더 많은 목숨을 살릴 때가 있다.”

유 씨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묵연주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군량은 어디로 갔습니까.”


****

계단 아래에서는, 마른 자가 먼저 움직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몸이 가볍고 유연했다. 계단 옆 벽에 손을 짚고 옆으로 비틀어, 좁은 난간 사이로 파고들었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올라오는 움직임이었다.

손목 안쪽에서 번쩍, 얇은 비수가 미끄러져 나왔다.

칼끝이 계단의 반을 가로질렀다. 위로 뛰면 가슴, 뒤로 물러나면 허벅지가 베일 거리였다.

서이강은 위로도, 뒤로도 가지 않았다.

몸을 낮게 웅크리며 난간에 어깨를 붙였다. 비수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눈앞에서 흩날렸다.

그는 생각했다.

이 자리는 오래 버티는 곳이 아니다. 오래 버티면 미끄러진다. 그러니 오래 버티지 않고, 짧게 쓰고 버려야 한다.

그 순간, 그의 발이 움직였다.

미끄러지는 힘을 그대로 이용해, 발끝으로 계단 모서리를 차올렸다. 튀어나온 돌조각이 비수 손목을 향해 날아갔다.

쾅—

마른 자의 손목이 꺾이면서 비수가 계단 아래로 튀었다. 피가 한 줄기 뿜어졌다.


****

상서루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군량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지훈이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갔다.”

“어디로.” 묵연주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지도에도 없고, 보고서에도 없는 군영.” 왕지훈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성에서 내려온 지시였다. 공식 기록에는 없는 병력, 누가 지휘하는지도 알 수 없는 사병 비슷한 것들을 위해, 군량과 무기가 흘러들어갔다.”

“누구를 위해서요.” 유 씨가 물었다.

“위쪽 몇 사람.” 왕지훈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거래하는 강호의 몇몇. 일명회까지는 몰랐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는 말을 끊었다.

“거짓말이다. 그때도, 지금도.”

묵연주의 손이 떨렸다.

“그걸 알고도, 눈보라 탓이라 쓰셨습니까.”

“그렇게 쓰지 않으면, 사형장에 서는 건 나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지훈이 말했다. “눈보라 탓으로 돌리면, 적어도 지금 당장 죽는 놈들은 줄어든다. 나는 그쪽을 택했다.”


****

계단 위, 숨이 거칠어졌다.

마른 자는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한 손은 피로 젖어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두건을 쓴 남자가 그 앞에 서서, 다시 중심을 낮췄다.

“돌아갈까.” 두건을 쓴 남자가 낮게 물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눈에 너무 띄지.”

“여기까지 왔다.” 마른 자가 이를 악물었다. “위에 뭐가 있든, 먼저 보는 게 우리 일이다.”

서이강은 그 말을 들으며 호흡을 고르게 했다.

표사는 짐과 길을 본다. 일명회의 이 둘은 정보를 본다. 보는 것이 다를 뿐, ‘먼저 본다’는 말에는 약간의 동질감이 있었다.

“알겠소.” 서이강이 짧게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둘 다 올라오시오. 다만—”

칼끝이 계단 위를 가리켰다.

“살아서만 올라오려고 하지는 마시오.”


****

상서루 창밖으로, 먼 쇳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직 이 누각까지 닿을 만큼 가깝지는 않았지만, 왕지훈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 병사들이 집결할 때 나는 소리, 갑옷과 무기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소리였다.

“시간이 많지는 않겠군.” 그가 중얼거렸다.

묵연주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층 줄었다.

“스승님이 지키려 했던 건, 단지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누가 무엇을 했는지— 언젠가 누군가가 그걸 보고, 같은 일을 막을 수 있게 만들고 싶어 하셨죠.”

“그래서 운령문에 남겼지.” 왕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상관없는 곳에. 그래야 내가 빼앗을 수 없으니까.”

그의 눈빛이 묵연주의 약낭과 품 속을 스쳤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록이 네 머릿속에 있겠지.”

묵연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왕지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변명도, 핑계도 아니라, 선택을.


****

계단 위의 싸움은 길지 않게 끝났다.

두건을 쓴 남자가 마지막으로 뛰어올랐을 때, 서이강은 그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았다. 몸을 반 발짝 틀어, 어깨와 어깨가 스치도록 내버려두었다. 대신 발을 걸었다.

미끄러운 계단, 달려오는 무게, 중심을 잃은 몸.

쾅—

남자의 등이 계단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숨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그 틈에 서이강의 도끝이 그의 목덜미 한 치 앞에서 멈췄다.

마른 자가 몸을 날려 동료를 잡으려 했지만, 한 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둘은 포개지듯 계단에 엎어졌다.

서이강은 숨을 몰아쉬며 칼을 거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가 말했다. “살려서 데려오라는 목간을, 전에 본 적이 있소.”

마른 자가 눈을 치켜떴다.

“우릴… 살려서, 누구에게 데려가려는 건가.”

“그건 나도 아직 모른다오.” 서이강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오늘 이 계단에서 둘을 베면, 위에서 하는 이야기가 바뀔 것 같아서.”

그는 계단 위쪽을 한 번 올려다봤다.

“위에 도착할 때까지, 아직 칼을 다 쓸 필요는 없소.”


****

상서루 문 앞에, 발소리가 멈췄다.

유 씨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기 전인데도, 누가 오는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해진 걸음소리, 계단 위를 버텨온 사람의 숨결.

문이 열렸다.

서이강이 서 있었다. 눈빛은 여전했지만, 어깨와 옷자락 여기저기에 눈과 먼지가 묻어 있었다. 뒤쪽 계단 아래에는 기척 둘이 더 있었다. 완전히 내려가지는 못하고, 반쯤 계단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는 사람들의 기척.

“늦었소.” 서이강이 말했다.

“적당한 때 왔다.” 유 씨가 짧게 대답했다.

왕지훈의 시선이 서이강에게 옮겨갔다.

“청조와 운령문,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서이강의 허리춤에 걸린 짧은 도를 봤다. “길 위에서 일어난 일들의 끝이 여기로 왔군.”

누각 바깥에서, 쇳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성 안쪽에서 집결한 병사들이 상서루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일명회의 상위 표식을 단 자들도,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

왕지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다.” 그가 말했다. “오늘 여기서, 적어도 한 번은 곧게 서 보지.”

그의 손이 옆의 나무 상자 위로 뻗었다. 오래된 목간과, 봉인되지 않은 죽간 묶음이 그 안에 있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이제는 내가 아니라, 너희가 정해라.”

누각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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