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설도하 16화 – 기록소의 핏자국 | 정통 무협 웹소설 연재
풍설도하 16화 — 「기록소의 핏자국」
청조 기록소는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있었다.
관도에서 두 마장을 비껴난 산자락, 낡은 사찰 폐허 뒤편에 돌벽 하나가 서 있었다. 이끼가 덮인 벽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절터의 잔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 씨는 주저 없이 돌벽 왼쪽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두 번 누르고, 한 번 쓸었다.
낮은 진동음과 함께, 벽 아랫부분이 안쪽으로 밀렸다. 사람 하나 지나갈 틈이 생겼다.
유 씨가 멈췄다.
몸이 굳었다.
“왜 서 있소?” 서이강이 물었다.
“냄새.” 유 씨가 짧게 말했다.
서이강이 먼저 코를 들었다. 그다음 순간 손이 칼자루로 갔다.
피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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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씨가 천천히 몸을 낮추며 틈 안으로 들어갔다.
서이강이 바로 뒤를 따랐다. 묵연주가 마지막으로 들어서며 입구 쪽을 확인했다. 뒤는 조용했다. 사람 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안은 달랐다.
돌로 된 복도, 낮은 천장. 양쪽으로 나무 선반이 이어졌고, 그 위에 죽간과 목간, 가죽 묶음들이 가득했다. 청조가 수십 년에 걸쳐 모은 기록들이었다.
그 중간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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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었다.
허리가 굽은, 기록소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등에 타격을 두 번 받은 흔적이 있었다. 혈도를 짚혔는지, 호흡이 있었지만 의식이 없었다.
묵연주가 즉시 무릎을 꿇고 노인의 맥을 짚었다.
“살아 있어요. 하지만 혈도 두 곳이 막혔어요.”
그녀의 손가락이 노인의 목 옆과 왼쪽 어깨 아래를 차례로 짚었다. 두 번의 지압, 정확한 혈위였다. 노인의 숨이 갑자기 깊어졌다.
“풀렸소?” 서이강이 물었다.
“일단은요.” 묵연주가 일어서며 말했다. “혈도를 짚는 데 쓴 내력이 가볍지 않아요. 아는 사람이 한 거예요.”
유 씨가 복도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기록은?”
선반 위의 절반이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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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강은 빈 선반을 훑으며 생각했다.
가져간 것이 있고, 남긴 것이 있었다. 무작위로 쓸어간 것이 아니었다. 특정한 것만 골라 가져갔다. 아는 사람이 한 짓이었다.
“뭐가 없어졌소?” 서이강이 유 씨에게 물었다.
유 씨의 눈이 빠르게 선반을 훑었다. 표정이 굳어졌다.
“변경 관련 기록 전부. 그리고—” 그가 선반 맨 안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청조 창설 초기 내부 문서.”
“청오와 관련된 것들이겠군요.” 묵연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서이강이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안에 있을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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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소 안쪽 통로는 T자로 갈라졌다.
왼쪽은 계속 기록 선반이 이어지는 구간, 오른쪽은 돌문이 하나 있었다. 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불빛이었다. 횃불이나 등잔이 아니라, 납작하게 퍼지는 유등(油燈) 특유의 빛이었다.
누군가 아직 안에 있었다.
서이강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세웠다.
그는 소리 없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발끝부터 착지하는, 표사 시절 밤 야영지를 순찰할 때 익힌 걸음이었다. 발소리가 없었다. 숨소리도 거의 없었다.
문 앞 두 걸음.
안에서 기척이 들렸다.
종이 넘기는 소리. 죽간이 선반 위에 올려지는 소리. 서두르지 않는 사람의 소리였다.
서이강이 발을 걷어 문을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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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문이 안쪽으로 터지듯 열렸다.
방 안, 유등 하나가 켜진 책상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깊은 남색 도포, 희끗한 관자놀이, 가느다란 손가락이 죽간 한 편을 쥐고 있었다.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이강을 바라보았다. 유등 빛이 그의 눈에 반사됐다. 차갑고 조용한 눈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그가 한국어도 아닌 중원 관화도 아닌, 이상하게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서이강이 도를 반쯤 뽑으며 말했다.
“그 죽간 내려놓으시오.”
“내려놓겠다.”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먼저 한 가지만 묻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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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연주가 여기 왔나.”
서이강의 눈이 좁아졌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 없었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정보였다.
남자가 죽간을 책상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양손이 드러났다. 무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안심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청오다.” 남자가 말했다.
뒤에서 묵연주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멈추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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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유 씨가 문 뒤에서 말했다.
청오가 유 씨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죽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다르지.” 그가 말했다. “청조가 나를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왜요.” 묵연주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청오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됐다. 뭔가를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오래 보는 눈빛이었다.
“운령문의 마지막 제자가 맞군.”
묵연주가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들어왔다.
“대답해요.”
“이십 년 전, 내가 군량 경로를 설계한 것은 사실이다.” 청오가 말했다. “하지만 그 경로가 사병에게 흘러들어간 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누가 바꿨죠.” 묵연주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왕지훈의 윗사람.” 청오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사라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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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침묵.
서이강은 도를 완전히 뽑지 않은 채, 청오와 묵연주 사이의 각도를 유지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무기 하나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당신이 지금 여기 온 이유는.” 서이강이 물었다.
“왕지훈이 기록을 넘겼다면, 그 안에 내 자가 있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청오가 말했다. “내가 직접 없애지 않으면, 나를 찾는 사람들이 먼저 찾을 테니까.”
“일명회요?” 유 씨가 물었다.
“일명회보다 더 위쪽.”
청오의 시선이 방 안 유등을 스쳤다가, 다시 묵연주에게 왔다.
“운령문 스승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나다.” 그가 말했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
묵연주의 숨이 한 박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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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했소, 그 자리에서.” 서이강이 먼저 물었다.
묵연주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청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기록을 지키되, 때가 될 때까지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책상 위 죽간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그 분이 말씀하셨다. 언젠가 제자가 이 기록을 들고 올 것이라고.”
묵연주의 손이 품 안의 죽간을 짚었다.
“그리고 그 제자 옆에는,” 청오가 말을 이었다. “길을 아는 사람이 함께 있을 거라고.”
서이강이 자신도 모르게 묵연주를 봤다.
묵연주는 청오를 보고 있었다. 눈이 붉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주저함이 없었다.
청오가 일어서며 말했다.
“왔군.”
“누가요?” 서이강이 말했다.
“일명회보다 위.” 청오의 눈빛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차갑던 눈에 날이 섰다. “이십 년 동안 이 기록이 드러나는 것을 막아온 자들이다.”
서이강이 이번에는 도를 완전히 뽑았다.
칼날이 유등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몇 명이오.”
“넷이상.” 청오가 소매를 걷었다. 팔목 안쪽에 가느다란 철선이 손가락 사이로 걸려 있었다. 지선(指線), 내력을 실어 쏘는 암기였다. “그리고 적어도 둘은 내력이 있다.”
묵연주가 약낭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검은 환약 세 알을 올렸다.
“흡공독(吸功毒)이에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내력을 쓰는 순간 역류한다. 두 식경은 쓸 수 없게 돼요.”
유 씨가 좁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공간이 좁습니다. 통로 하나에 몰아넣어야 해요.”
서이강이 도를 고쳐 쥐었다.
표사는 짐을 지킨다.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것들이 전부 짐이었다. 죽간, 청오, 그리고 묵연주.
“내가 앞에 서겠소.”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림자가 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