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무협 웹소설 풍설도하 3화 피 냄새와 약향
풍설도하 3화 피 냄새와 약향
버려진 나루터 창고는 바람 막이 이상의 가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반쯤 기운 지붕 사이로 눈발이 듬성듬성 새어 들어왔고, 벽판자는 썩어 군데군데 벌어져 있었다. 그래도 네 면이 완전히 뚫린 역참보다는 나았다. 무엇보다 강바람을 조금은 피할 수 있었다.
서이강은 창고 문을 발로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썩은 밧줄 냄새, 젖은 나무 냄새, 오래된 진흙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그러나 곧 그 위로 더 진한 냄새가 올라왔다.
피 냄새.
그 냄새의 근원은 그의 등 위에 업힌 묵연주였다.
“내려.”
그가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묵연주는 스스로 서 보려 했지만, 두 걸음도 못 가 무너질 뻔했다. 서이강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체면상 뿌리치려 했으나, 결국 벽에 기대 앉을 수밖에 없었다.
“불부터 피워.”
목소리가 전보다 더 낮고 거칠었다.
서이강은 창고 한쪽에 널브러진 마른 부목과 부러진 상자 조각을 모았다. 다행히 안쪽 깊은 곳에는 젖지 않은 나무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이 얼어 붙을 듯 떨리는데도 부싯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몇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야 가느다란 연기 끝에 주황빛 불꽃이 피어났다.
모닥불이 살아나자 창고 안 그림자도 조금 물러났다. 그제야 그는 묵연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핏기 없는 피부. 입술은 하얗게 질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아직 또렷했다. 차갑고 경계심 가득한 그 눈빛만은 상처 따위에 지지 않겠다는 듯 살아 있었다.
“어깨 보여.”
묵연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명령하지 마.”
“죽고 싶으면 그러든가.”
“말단 표사가 입이 제법 거칠군.”
“지금은 말단이 아니라 당신 목숨 붙드는 사람이지.”
그 말에 묵연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겉옷 매듭을 풀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화살촉이 완전히 박히진 않았지만 날카롭게 긁고 지나가 살이 길게 찢어졌다. 옷감이 피에 엉겨 달라붙어 있었다.
서이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두고 아직 걸으려 했다고?”
“기어서라도.”
“고집이 병이네.”
“살아남으려면 고집이 필요해.”
그는 대꾸 대신 칼을 불에 그슬려 소독하고, 가위 대신 날 끝으로 옷감 주변을 조심스레 잘라냈다. 묵연주의 어깨와 목선이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났다. 서이강은 순간 시선을 피했다가, 곧 다시 상처로 눈을 돌렸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와중에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몸은 제멋대로 반응했다.
묵연주가 그걸 눈치챘는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겠지?”
“가만히 있어.”
“재미없군.”
“피를 너무 흘리면 더 재미없는 일이 생겨.”
그는 창고 안 물통에서 얼음 섞인 물을 가져와 천에 적셨다. 상처를 닦아내자 묵연주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신음은 내지 않았다. 대신 왼손으로 바닥 널판자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아프면 말해.”
“그 정도는 참아.”
“아까는 업혔으면서.”
묵연주는 그제야 짧게 웃었다. “그건 선택지가 없었지.”
치료는 서툴렀다. 서이강은 표국에서 말의 상처나 자기 손 베인 것쯤은 꿰매 봤지만, 여자의 어깨를 다뤄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눈앞의 여자는 조금만 방심해도 비녀를 목에 들이댈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약낭을 펼쳤다. 다행히 묵연주의 허리춤 약낭에는 지혈산과 소염초가 있었다.
“이거 써도 되나?”
“가장 작은 병은 반만. 가루는 너무 많이 뿌리지 마. 열 오른다.”
“알면 당신이 하지 왜.”
“지금은 손이 떨리니까.”
그 한마디가 예상보다 솔직해서 서이강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묵연주도 자신이 불쑥 약한 말을 했다는 걸 느꼈는지, 곧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말없이 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손끝이 몇 번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 불가에선 나무 타는 소리가 작게 울렸고, 창고 밖에서는 바람이 문을 긁었다. 그런 소리들이 이상하게 더 선명하게 들렸다.
붕대를 마치고 손을 떼자 묵연주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생각보다 안 서툴러.”
“생각보다 말이 많군.”
“너도 그렇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서이강은 그제야 자신의 발목 상처도 만만치 않다는 걸 떠올렸다. 피가 굳어 바짓단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고 싶진 않았다. 묵연주는 그걸 또 눈치챘다.
“앉아.”
“괜찮아.”
“앉으라고 했어.”
이번에는 그녀가 작은 약병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리던 아까와 달리, 눈빛에는 다시 익숙한 날카로움이 돌아와 있었다. 서이강은 괜히 반항하다가 결국 불가 앞에 앉았다.
묵연주가 그의 바짓단을 칼끝으로 찢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상처에 닿자 욱신거림이 몰려왔다.
“생각보다 깊네.”
“걸을 만해.”
“너희 표국 사람들은 전부 이런 식이야?”
“어떤 식.”
“죽을 때까지 괜찮다고 우기는 식.”
서이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약을 바르자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묵연주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프면 말해.”
“그 정도는 참아.”
이번에는 그녀가 진짜 웃었다. 눈매가 살짝 풀리며 처음 보는 표정이 스쳤다.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 속에도 분명 인간적인 온기가 숨어 있다는 걸, 서이강은 그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치료가 끝난 뒤 둘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청동판은 여전히 서이강의 품 안에 있었다. 묵연주는 한참 동안 말없이 불꽃만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보여.”
서이강은 망설였다. “당신이 먼저 말해. 그게 뭔지, 왜 쫓기는지.”
“네가 먼저 믿지 못하겠다면, 나도 전부 말할 이유가 없어.”
“나는 적어도 이름은 말했어.”
“그래서?” 묵연주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름을 알려주면 마음까지 알 수 있나?”
서이강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도 아직 그녀를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함께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는 믿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결국 청동판을 꺼내 불빛 아래 놓았다.
얇은 청동판 표면에는 검푸른 녹이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그러나 새겨진 선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한눈에 보면 사람의 몸과 경맥도 같고, 산과 강의 지형도 같았다. 중앙에는 작게 파인 원형 표식이 일곱 개, 외곽에는 글자 같은 흔적이 흩어져 있었다.
묵연주의 눈빛이 달라졌다.
탐욕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움과 확신이 동시에 스치는 표정에 가까웠다.
“역시….”
“뭔데?”
“쇄맥도해의 한 조각일 가능성이 커.”
“쇄맥… 뭐?”
“전설처럼 떠돌던 물건이야. 사라진 문파와 변방 군진, 오래된 수맥 지도가 뒤섞였다는 소문만 있었지. 실물은 나도 처음 봐.”
“그런 귀한 걸 왜 우리 표국이 운송했지?”
묵연주는 청동판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누군가 표국을 운반수단으로 쓴 거겠지. 작은 표국이면 오히려 눈을 피하기 쉬우니까.”
서이강은 곽노칠의 얼굴을 떠올렸다. “표두는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일부는.”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지?”
“말하는 순간 너희 중 누군가가 먼저 팔아넘겼을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은 냉혹했지만 부정하기 어려웠다. 서이강은 표국 식구들을 전부 믿고 싶었으나, 오늘 밤 너무 많은 것이 무너졌다. 누군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누군가는 수레를 노렸으며, 누군가는 청동판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물었다. “흑사방, 병부 인장… 그 자들은 누구였지?”
묵연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한쪽은 흑사방일 가능성이 높아. 독과 암기, 움직임이 그래. 하지만 병부 인장이 나온 건 이상해. 관이 같은 물건을 쫓고 있다는 뜻이니까.”
“관과 흑도가 손잡는다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흔한 일이지.”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서늘했다.
서이강은 청동판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 선들… 경맥이 아니라고?”
“경맥처럼 보이게 만든 지형도일 수 있어. 또는 지형도처럼 보이게 만든 경맥도일 수도 있고.”
“말장난 같군.”
“보통 진짜 비밀은 그렇게 숨겨.”
묵연주는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모닥불 빛이 검은 결 사이에 붉은 금을 그었다.
“봐. 여기 일곱 점. 혈도처럼 찍혀 있지만, 강줄기 분기점으로 볼 수도 있어. 그리고 이 옆의 구부러진 선은 산맥이 아니라 사람의 팔뚝 내측 경락처럼 읽히기도 하지.”
서이강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보았다. 정말 그럴듯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은 조금 읽었지만 무공 경맥이나 지형 해독에 밝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선들이 눈에 익었다. 어쩌면 표행하면서 본 길과 물줄기, 산세 기억이 머릿속 어딘가와 맞닿는지도 몰랐다.
“이건….”
그가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짚었다. “이 굽이는 북변 협곡 아래 물길이랑 닮았어.”
묵연주가 그를 돌아보았다. “확실해?”
“확실까진 아니지만. 길을 다닐 때 지형은 기억하는 편이야.”
“장부만 보는 줄 알았더니.”
“냄새랑 길은 잘 안 잊어.”
묵연주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보았다. 그 시선이 전과 조금 달랐다. 평가가 바뀌는 눈빛. 단순한 짐꾼이 아니라 쓸모 있는 동료로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괜찮군, 서이강.”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당신도.”
“뭐가?”
“생각보다 덜 재수 없어.”
묵연주는 피식 웃더니 모닥불에 나무 한 토막을 던졌다. 불꽃이 튀었다.
그때 창고 밖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
둘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서이강은 도를 집었고, 묵연주의 손에는 언제 비녀가 들렸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둘은 소리 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방금까지의 미묘한 온기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다시 생존의 냄새가 공기를 메웠다.
소리는 문 밖이 아니라 지붕 위였다.
눈을 밟는 아주 약한 발소리.
하나? 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가볍고 조심스러웠다. 추격자가 다시 찾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단지 들짐승일 수도. 하지만 이런 밤에 우연을 믿는 것은 어리석었다.
묵연주가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불 꺼.’
서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빨리 모래와 젖은 천을 집어 불 위에 덮었다. 창고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틈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설광만 남았다.
두 사람은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지붕 위 소리가 멈췄다.
잠시 정적.
그리고—
쿵.
무거운 것이 지붕 가장자리에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판자가 삐걱거렸다.
서이강은 숨을 죽였다. 묵연주의 어깨가 그의 팔에 닿아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이상하게도 방금 전까지 떨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옆의 이 위험한 여자가 지금만큼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묵연주의 손이 그의 손목을 아주 잠깐 눌렀다. 진정하라는 뜻인지, 준비하라는 뜻인지 모를 짧은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 한순간 접촉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공연히 더 크게 뛰었다.
그때 지붕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안에 있는 거 안다.”
남자 목소리였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힘을 감춘 음성.
“불 냄새가 났거든.”
서이강과 묵연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밖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적은 아니다. 적어도 오늘 밤 너희를 죽이러 온 쪽은 아니다.”
침묵.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운령문이라는 이름을 아는가?”
서이강은 순간 숨을 멈췄다.
묵연주의 눈빛도 가늘어졌다.
오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청동판이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