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설도하 12

풍설도하 12화 – 성문 안의 그림자 | 정통 무협 웹소설 연재

풍설도하 12화 — 「성문 안의 그림자」


변경 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먼저 보인 것은 성벽이 아니었다. 연기였다.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회색 연기 기둥이 여러 개 솟아올라 있었다. 군막과 병영, 민가에서 올라오는 불길. 멀리서 보면 안개와 다를 바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성벽의 윤곽이 드러났다.

두 겹으로 둘러쳐진 토성 위에 돌이 덧입혀져 있었다. 오래된 구조 위에 덧댄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곳이 한때 더 거칠고, 더 헐벗은 곳이었다는 증거였다.

서이강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성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변경 사읍성(四邑城)입니다.” 유 씨가 말했다. “왕지훈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리이기도 하고요.”

묵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다녀가신 곳도 여기예요.”

그 말에 바람이 조금 더 차갑게 느껴졌다.


****

성을 정면으로 향하는 관도는 이미 검문이 시작된 상태였다.

성문 앞에 설치된 목책과 말뚝 사이로 징집된 농민병들과 상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병사들은 서류와 짐을 검사하며 사람들을 하나씩 들여보내고 있었다. 긴 줄의 끝에는 불안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유 씨가 관도에서 살짝 옆으로 빠졌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그리고 눈에 너무 띄죠.”

“그럼 어디로?”

“왕지훈이 자주 쓰던 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은퇴한 사람이 쓰던 길이 지금도 열려 있을까요?” 서이강이 물었다.

“그 사람이 완전히 내려온 게 아니라면요.”

유 씨가 그렇게 말할 때, 얼굴에 잠시 묘한 웃음이 스쳤다.


****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반 십리쯤 돌아가자 작은 하천이 나왔다.

하천은 성벽 바로 아래를 스쳐 흐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도랑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넓어져 개천이 되었지만, 성벽 아래 돌 사이로 물이 스며드는 지점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에, 다른 곳과 조금 다른 흔적이 있었다.

돌 색이 옅게 변한 부분. 손이 자주 닿았던 자국.

“저기요.” 유 씨가 낮게 말했다. “공식 출입로는 아닙니다. 하지만 왕지훈이 성 안팎을 오갈 때, 가끔 쓰던 비공식 통로죠. 그가 완전히 실각했다면 이미 막혔을 테고, 지금도 일부 영향력이 남아 있다면—”

“열려 있겠죠.” 묵연주가 말을 이었다.

하천 물살은 생각보다 세지 않았다. 세 사람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무릎 아래까지 차오르는 찬물이 다리를 감쌌다.

성벽 아래, 어두운 돌 사이에 낮은 천장과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수문(水門)이오?”

“원래는 그렇죠.” 유 씨가 말했다. “지금은 물보다 사람이 더 자주 다니는 길입니다.”


****

수문 안쪽은 눅눅했다.

돌벽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머리 위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불을 켜지는 않았다. 대신 손으로 벽을 짚으며 움직였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스무 걸음도 채 안 되어 계단이 나왔다.

계단 위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위에는 누가 있소?”

서이강의 질문에, 유 씨가 잠시 숨을 골랐다.

“왕지훈의 사람… 이었을 겁니다. 적어도 스승님이 계실 때까지는.”

“지금은요?”

“확인해 봐야죠.”

계단을 올라가자 좁은 창고 같은 방이 나왔다. 곡물 자루와 술 항아리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구석에 작은 등잔 하나가 켜져 있었다. 그 옆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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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에 가까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노인이었다.

허리는 굽었지만 눈은 살아 있었다. 세 사람이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노인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손에 들고 있던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오랜만이군.” 유 씨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직 이 길을 지키고 계셨습니까.”

노인이 유 씨를 훑어보았다.

“청조의 자식들 얼굴을 잊을 것 같으냐.”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그런데 이 둘은 누구냐.”

유 씨가 서이강과 묵연주를 가리켰다.

“왕지훈이 숨긴 기록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인의 시선이 묵연주에게 머물렀다.

“눈매가… 조금 닮았군.”

“누구와요?” 묵연주가 물었다.

“그 스승이라는 사람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왕지훈은 성 안에 있다. 하지만 예전의 그 사람은 아니다. 만나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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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문을 나서자, 성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바깥에서 보던 변경 성은 차갑고 거칠어 보였지만, 안쪽은 의외로 화려했다. 군영과 시장, 관아와 사가가 뒤섞여 있었다. 겨울인데도 사람들은 바빴다. 장수가 병사들을 꾸짖는 소리, 상인이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뒤엉켜 올라왔다.

“왕지훈은 지금 어디에 있소?” 서이강이 노인에게 물었다.

“상서루(上書樓).” 노인이 짧게 대답했다. “성 안쪽 언덕 위, 가장 높은 누각이다. 한때는 군령이 오르내리던 곳이었지. 지금은…”

“지금은요?”

“누군가가 그 사람을 감시하기 좋은 자리다.”

노인은 더 말하지 않고 길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발로 가야 한다. 청조도, 운령문도, 일명회도— 다들 저기서 엉켜 있으니.”


****

상서루로 올라가는 계단은 길고 좁았다.

돌로 다져진 계단 위에 눈이 적당히 쌓여 있어, 발소리가 많이 죽었다. 대신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세 사람은 일렬로 걸었다. 제일 앞에는 유 씨, 그 뒤에 묵연주, 마지막에 서이강.

계단 중턱쯤에서, 아래쪽 길에서 낯익은 기척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서이강이 먼저 알아챘다.

“따라왔소.”

그가 낮게 말했다.

묵연주와 유 씨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 입구 쪽,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제 언덕 위에서 세 사람을 내려다보던 그 그림자들이었다.

“일명회.” 유 씨가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요.”

“쳐올라오게 놔두겠소?” 서이강이 물었다.

“아니요. 지금은 올라가는 쪽이 먼저입니다.” 유 씨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먼저 왕지훈을 만나는 게, 그들보다 중요하죠.”

계단은 한 줄로밖에 설 수 없었다. 싸우기도, 피하기도 애매한 자리였다.

서이강은 잠시 생각했다가, 한 발 옆으로 비켜 계단 옆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먼저 올라가시오.”

묵연주가 그를 봤다.

“당신은?”

“조금 늦게 가도 되오.” 서이강이 짧게 웃었다. “표사를 해보니, 짐이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면 그걸로 되는 일이 많더이다.”


****

일명회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라왔다.

위아래로 거리가 줄어드는 동안, 서로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하나는 어제 언덕 위에 서 있던 두건을 쓴 남자, 다른 하나는 마른 체구의 자였다.

두건을 쓴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길이 좁군.”

“좁으면 돌아가면 되오.” 서이강이 말했다. “위에는 이미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올라가야 할 곳도 위다.”

남자가 난간에 손을 올렸다. 장갑 너머로 보이는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비키지 않겠다면, 이 계단에서 해결해야겠지.”

서이강은 난간에서 몸을 떼었다.

“계단은 미끄럽소. 굴러 떨어지면 아플 거요.”

그는 허리춤의 칼자루를 잡았다.

“그러니 조심해서 올라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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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묵연주와 유 씨는 상서루에 먼저 도착했다.

누각 주변에는 병사 둘이 서 있었지만, 유 씨가 내민 패를 확인하더니 별다른 의심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청조의 이름과 왕지훈의 옛 인연이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상서루 안쪽은 조용했다.

창밖으로 성 안과 밖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멀리 관도까지 보였다. 그 풍경을 등지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짙은 청색 관복, 반쯤 흰머리, 곧은 등.

묵연주는 스스로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왕지훈.”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흘러나왔다.

그 이름은 그동안 죽간과 벽, 스승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던 이름이었다. 이제 처음으로 살을 가진 사람으로 눈앞에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은 생각보다 마른 편이었다. 눈매는 예리했지만, 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깊었다. 한때는 칼처럼 날카로웠을 눈빛이, 지금은 칼집 속에서 녹이 슬어가는 철처럼 보였다.

“청조의 사람인가.” 왕지훈이 먼저 물었다.

유 씨가 고개를 숙였다.

“예, 총관.”

“총관이 아니다.” 왕지훈이 짧게 잘랐다. “지금의 나는 그냥 변방 노인일 뿐이다.”

그의 시선이 묵연주에게 옮겨갔다.

“그 눈… 운령문의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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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아래에서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누각 안에는 아직 닿지 않은 소리였다. 왕지훈과 묵연주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십 년 전의 기록을 지키려 했던 문파의 마지막 제자, 다른 한 사람은 그 기록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돌렸던 장수였다.

“스승님을 기억하십니까.” 묵연주가 물었다.

왕지훈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사람은 나를 기억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말했다. “그러면 살아 있을 수도 있었지.”

묵연주의 손이 다시 움켜쥐어졌다.

“이십 년 전, 군량 사만 석.”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자연 손실이라고 보고하셨죠.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왕지훈이 말을 끊었다. “오늘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밖으로 시선이 잠시 흘렀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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