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설도하 9

풍설도하 9화 – 몰이 | 일명회 본대와의 대결 정통 무협소설

풍설도하 9화 — 그림자의 이름


청하령 하산, 군진 기록 분석, 제3세력 등장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서리가 엉긴 돌길은 미끄러웠고, 바람은 사면을 비스듬히 밀어붙였다. 서이강은 묵연주보다 반 보 앞서 걸으며 발을 내딛기 전에 돌 표면을 먼저 밟아 확인했다. 말은 없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등 뒤로 청하령 석벽이 멀어졌다.

저 안에서 일명회가 뭘 찾고 있을지, 서이강은 대략 짐작했다. 아무것도 없다. 벽의 문자는 남아 있겠지만, 그것을 읽어낼 열쇠는 청동판이고 청동판은 묵연주의 품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묵연주의 머릿속에.

서이강은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무겁다는 게 아니라— 저 여자가 이 짐을 얼마나 오래 혼자 들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

산 아래 마을이 나오기 전, 관도에서 두 마장쯤 비껴난 곳에 낡은 폐가가 있었다.

원래는 산지기 막사였을 것이다. 지붕의 절반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한쪽 구석은 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서이강이 입구를 막고 불씨를 살리는 동안 묵연주는 바닥에 천을 깔고 앉았다.

그녀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죽간 조각들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아까보다 더 차분한 손이었다. 유적 안에서는 불꽃이 꺼질까봐 서둘러야 했다면, 지금은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서이강은 반대편에 앉아 불을 살피며 그녀를 보지 않는 척 봤다.

“맞추면 되는 거요? 순서를 찾는 건가?”

“네.” 묵연주가 짧게 답했다. “끊어진 순서만 찾으면 전문(全文)이 나와요.”

“벽에 새겨진 것과 이게 같은 내용이오?”

“보완하는 거예요. 벽은 배치도와 경로. 이건 이름과 날짜.”

서이강은 잠자코 불을 살폈다.

이름과 날짜. 그 말의 무게가 잠시 공중에 떠 있었다.


****

죽간 조각을 맞추는 데 두 식경이 걸렸다.

묵연주는 마지막 조각을 제자리에 놓고 천천히 전체를 읽었다. 서이강은 불을 지켰다. 끼어들지 않았다. 그 여자가 읽어야 할 것이 있을 때는 공간을 주는 것이 맞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묵연주가 읽기를 마쳤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표정이 아까와 달랐다. 굳어 있었다. 차갑다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억누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왔소?”

“변경 총관 왕지훈(王志薰).”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십 년 전 동계(冬季) 보급 차질. 군량 사만 석 행방불명. 보고서에는 눈보라로 인한 자연 손실이라고 적혀 있지만—”

그녀가 잠시 멈췄다.

“이 기록에는 행선지가 있어요. 군량이 어디로 빠졌는지.”

서이강은 말을 잃었다.

사만 석. 군사 수만 명이 한 달을 버틸 양이었다. 그것이 눈보라에 사라진 게 아니라,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기록이 이십 년 동안 이 산속 유적에 봉인되어 있었다.

“운령문이 이걸 세상에 내놓지 않은 이유가 있었겠소.”

“내놓는 순간 왕지훈이 아니라, 그 위까지 건드리게 되니까요.” 묵연주가 죽간 조각들을 도로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죽는다는 걸 스승님도 아셨을 거예요.”


****

불꽃이 작아졌다.

서이강이 잔가지를 더 얹었다. 파직, 소리를 내며 불이 되살아났다.

“스승은 왜 이걸 당신에게 남겼소?”

“남긴 게 아니에요.” 묵연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야 청동판의 존재를 알았어요. 청동판은 스승님이 감춘 게 아니라— 스승님이 감추던 중에 사라진 거예요.”

“누가 빼앗았소?”

“모르겠어요. 일명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표행 짐짝 안에 들어 있었소?”

묵연주가 그를 봤다. 오래 봤다.

“그게 제가 당신을 따라온 이유예요.”

서이강은 이해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청동판이 표행 물자 안에서 발견됐다는 것, 그것이 어느 경로를 거쳐 거기 있었는지— 묵연주는 그 흔적을 쫓아 서이강을 따라붙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나를 이용했소.”

“당신도 저를 이용했잖아요.”

그것은 반박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서이강은 짧게 웃었다. 피식, 소리도 없는 웃음이었다.

“뭐, 공평하긴 하오.”


****

밤이 깊어졌다.

바람이 폐가의 허술한 지붕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불 옆에 앉아 있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서이강은 생각했다.

변경 총관 왕지훈. 이 이름이 세상에 나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관부가 조용히 묻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무기 삼아 싸우는 자들이 생겨날 것인가. 일명회는 이것을 팔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 것도 있다. 강호의 어딘가에, 이 기록을 원하는 다른 세력이 분명히 있었다.

“이걸 어디로 가져갈 생각이오?”

묵연주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스승님이 지키려 했다면—” 그녀가 잠시 말을 고른 것 같았다. “지켜지는 곳이어야 해요. 팔리거나 이용되는 곳이 아니라.”

“그런 곳이 있소?”

“찾아야죠.”

서이강은 더 묻지 않았다.


****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묵연주가 먼저 눈을 감았다.

서이강은 경계를 섰다. 표사 시절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를 듣고,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 무엇이 가까워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는 묵연주 쪽을 보았다. 잠든 얼굴이었다. 낮과 다르지 않았다. 이 여자는 잘 때도 표정을 풀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서이강은 시선을 거뒀다.

표사는 짐을 지키는 사람이다. 지금 이 짐은 가죽 주머니 안의 죽간과, 저 여자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이다. 그 둘을 모두 지켜야 한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

아침이 왔다.

묵연주가 눈을 뜨자 서이강은 이미 입구 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밤새 새웠어요?”

“반씩 자면 되오.”

“깨우지 않았는데요.”

“당신이 잘 때 나는 더 잘 자지 못하오.”

묵연주가 그를 봤다. 그는 이미 입구 바깥을 살피러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약낭을 챙겼다.

이상한 말이었다. 칭찬인지, 불평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그녀는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

길을 나서기 전, 서이강이 물었다.

“방향은 어느 쪽이오?”

“동쪽으로 사흘. 관도를 피해서.” 묵연주가 앞을 보며 말했다. “중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요. 스승님이 한 번 언급했던 곳인데— 직접 가본 적은 없어요.”

“안전하오?”

“모르겠어요.”

“솔직하군.”

“거짓말하면 더 위험해요.”

서이강은 씩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있었다.

두 사람이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이강.”

그가 멈췄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묵연주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방이라 하거나, 그대라 하거나, 그냥 시선만 주던 여자였다.

그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어.”

그것이 그가 낼 수 있는 전부였다.

“잘 따라와요.”

묵연주가 먼저 걸었다.

서이강은 뒤를 따랐다. 한 발, 두 발. 평소와 같은 보폭으로. 하지만 어깨가 조금 펴져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방향으로.


****

오후가 기울 무렵, 두 사람은 관도 옆 낮은 숲에서 잠시 멈췄다.

서이강이 손을 들었다.

앞쪽 나무 그늘 아래,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이었다. 한 명, 혼자. 그러나 자세가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숨은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다.

서이강이 묵연주의 팔 앞에 손을 뻗었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삼십 중반쯤 된 외모였다. 허름한 여행객 차림이었지만 눈이 달랐다. 너무 조용한 눈이었다.

“찾고 있었습니다. 두 분을.”

목소리가 낮고 깔끔했다. 위협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도 되지 않았다.

“누구요?”

서이강이 물었다.

남자가 허리를 낮게 숙였다. 강호식이었지만 어딘가 관부 냄새도 섞여 있었다.

“청조(靑鳥)에서 왔습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묵연주의 눈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서이강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 이름을 이 여자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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